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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포커스 - 특별기고 - 자신의 부채를 어느쪽으로 펼칠 것인가?

작성자 관리자 | 날짜 2021.10.12

자신의 부채를

어느쪽으로 펼칠 것인가?

하종강 (성공회대학교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오래 전 사법연수원이 서초동에 있던 시절 연수원 노동법 세미나에서 노동법을 강의했다. 그 경험에 따르면 한국 법조인들은 지나치게 노동법에 대해 무지하다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당시 사법시험에 매년 천 명 가량을 합격시킬 때였는데, 노동법 세미나에 참여하는 연수원생은 50명 남짓이었다. 첫날 근로기준법 강의를 하고 나면 연수원생들은 "우리가 뭔가 알 거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오늘 강의를 들은 연수원 생들 중에서 90% 이상이 노동법을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입니다"라는 반응을 보이곤 했다.

거의 모든 법과대학에서 노동법은 선택 선택과목이 었다(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노동법이 필수과목인 법과대학은 3 곳밖에 없었다). 사법시험(2차)에 노동법이 출제되지 않으니 선택하는 학생들도 소수에 불과했다.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노동자이거나 그 가족으로 구성된 근대 산업사회에서 이렇게 노동법에 무지한 법조인을 양성하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는 것은 거의 공포영화에 가까운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들은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라는 말을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말은 어디까지나 '시민법'아래에서 진리일 뿐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신념이 중세 시대의 부당한 신분상 예속을 해체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신념이 체계화된 것이 바로 '시민법'이다. 신분상 구별되지 않고 모든 인간이 법 앞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는 시민법 이념은 일상 경제 활동이나 거래 활동 등을 규율하는 민법, 상법 등으로 체계화되었고 '계약 자유의 원칙' 등이 시민법 이념을 대표하는 기본 원칙으로 준수된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기업에 취업하는 직장인들이 맺는 근로계약 체결은 형식적으로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계약이지만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과 일자리를 공급하는 기업이 실제로는 평등할 수가 없다. 한 직장 내에서도 지위고하, 학력, 성별, 업무수행 능력, 외모 등 무수한 요인에 따라 불평등이 존재한다.

실제로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법 체계가 사회법이다. 사회법 아래에서는 "만인은 불평등하다"는 것이 진리이다. 따라서 불평등하게 적용함으로써 평등을 구현하는 것이 사회법의 원리이다. 줄타기하는 광대의 부채는 언제나 "편향적으로" 광대의 몸이 기울어지는 반대편으로만 펼쳐져야 한다. "엄정중립"을 유지하겠다고 부채를 가운데로만 펼치면 광대는 줄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만다. '중립'이란 '가운데에 세운다'거나 '가운데에 선다'는 뜻이다. 기울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반대편으로 힘을 가해야 가운데로 설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사회법의 원리이다.

노동법은 대표적인 사회법이다. 근로기준법에 피고용자 직장인의 성실 근로 의무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않은 채, 기업의 피고용자 직장인에 대한 의무만 세세하게 규정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지나친 규제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규율해도 기업은 개별 직장인과 대립하는 구도에서는 대부분 우위에 있기 마련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돈을 갚지 못하면 살을 1파운드 베어 가지겠다"는 계약은 '시민법'의 계약 자유 원칙 아래에서는 반드시 지켜야하는 유효한 계약이지만, '사회법'에서는 사회정의에 반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무효가 된다. 같은 사건을 어떤 원리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반대의 결론에도 달할 수 있다.

"나는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을 받고도 일하겠다"는 계약 역시 '시민법'의 계약 자유 원칙 아래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유효한 계약이지만, '사회법'에서는 사회정의에 반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무효가 된다. 지킬 필요가 없는 계약이 되는 것이다. 같은 사건을 어떤 원리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반대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흔히 얘기되는 경영권 · 인사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시민법 개념으로 보면 경영권의 폭이 매우 넓어지는데 경영권 사항이라는 것이 모두 피고용자의 노동조건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법개념 하에서는 고유한 경영 사항의 폭을 제한적으로 좁혀 규제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은 아직 국제노동기구(ILO)의 기본협약 8개 중에서 4개를 비준하지 않고 있다. 기본협약을 '핵심협약'이라고도 표현하는데 '기본협약'이 더 옳은 표현이다. 핵심은 가장 중요한 것이고 기본은 처음 시작 단계를 의미한다. 기초공사를 하지 않고는 집을 지을 수 없듯이 기본협약을 체결하지 않고는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유럽연합(EU) 대표단이 한국에 들어와 상주하면서까지 한국 정부에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을 요구했다. 한국 노동자의 인권을 염려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나라 기업들이 지키는 기준을 한국 기업들이 지키지 않으면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업이 적정한 비용을 부담하지 않는 경영방식에 대해서는 "자유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라고까지 표현한다.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을 비준하라는 요구는 노동 친화적이고 진보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철저한 시장경제 원리를 준수하자는 차원으로 봐야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가 지난해 9월 '우버' 등 플랫폼 노동자들을 함부로 자영업자로 구분하지 못하도록 기업을 규제하는 'AB-5' 법안을 통과시킨 것도 마찬가지이다. 기업이 마땅히 부담해야 할 노동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고 결국 시민의 세금으로 충당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을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로 지난 6월 국회에 노동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정부의 개정안에는 국제노동기구(ILO) 기준에 부합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간접고용 노동자 및 플랫폼 노동자 등 특수고용 형태 노동자들이 노동법상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거나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은 없고, 오히려 사업장 내에서의 쟁의행위를 지금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규제해, 사업장 내에서는 평화로운 방식의 쟁의행위조차 사실상 불가능하도록 만들거나 노동조합 상급단체 관계자의 사업장 출입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등 '개악'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노동계에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역대급 개악"이라고까지 표현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정부의 노동법 관장 업무를 담당하는 관료나 기업의 인사노무를 담당하는 임원들 중에 '사회법'에 대해서는 잘 모른 채 '시민법'만 공부한 사람들이 많은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남달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니 자신들이 무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법 사건을 계속 시민법 관점으로 판단하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법이나 인사노무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채를 어느 쪽으로 펼칠 것인지 항상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더욱 공정하게 만들어 바람직한 사회로 발전하도록 이끄는 길이다.